책에서 빅터프랭클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가치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삶에 대한 의미를 강조한다.
빅터는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에서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없는 부조리함을 모두 맛보았다.
오늘은 가스실로 가지 않기를, 내일은 좀 덜 맞기를 기도하며 혹시 내일은 빵 한 쪼가리라도 더 나오지 않을까 하며 말이다.
여기서 빅터는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한 삶과 비슷한 가치관을 보여준다.
카뮈의 전제는 이렇다.
그전에 실존주의란?
우리는 본질보다 앞선 실존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렇기에 삶에 정해진 의미, 부여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뮈의 부조리란?
이렇듯 오늘 책을 읽는 것과 게임을 하는 것에 대한 가치는 그 사람이 어디에 가치를 크게 두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뿐 사실 진정한 삶에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카뮈는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회귀의 삶을 반박하듯 그 하나 하나의 선택 또한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의미함속에서 반항하며 살아가는 것 부조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것"
빅터는 니체의 글을 종종 인용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또한, 글에서는 확고부동한 의미를 찾는 것, 그 삶의 의미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위대한 일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위대한 의지, 진리란 존재하는가?
여기서 밀란 쿤테라가 얘기한 키치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확고부동한 의미가 진리인가? 우리가 신을 죽이고 난 뒤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 우리는 그 의미를 신격화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빠진다.
물론 키치(확고부동한 의미)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인간이라면 그런 것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는 시련의 고통속에서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것, 인간의 존엄성, 미래에 대한 믿음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보여준다.
현대에 와서 물질이 풍요로워진 이 시대에서 화두 되는 것은 의미를 찾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많은 관심이 있고 의미를 잃은 세대라는 말도 들린다.
오늘날 삶에 의미를 찾는다는 것
오늘날 우리는 이전에 비해 훨씬 많은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선택지가 늘어남에 따라 삶에 대한 확고부동한 의지, 의미를 찾기에 힘들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서 우리의 선택이 항상 옳아야 하며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고통과 행복의 관계는 필연적이다. 고통과 행복의 팽팬한 긴장감은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